물은 신이 만들고 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모이면 으레 술이 등장하고,
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인다.
술은 뇌의 신피질을 억제해 시름을 잊게 해주고,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서로의 마음을 열어준다.
그러나 술이 과하면 몸을 해치고
사람과의 관계까지도 망칠 수 있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술을 즐기고 잘 다스리는 민족이었다.
최근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라며 칭송하기도 하지만
우리 전통 술도 와인의 역사와 문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 깊은 멋과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쌀이 곧 밥이자 술이요
‘주酒’자 속에 있는 ‘유酉’자는
술의 침전물을 모으는 밑이 뾰족한 항아리 모양을
본뜬 글자다.
‘술’의 어원은 ‘수블’
또는 ‘수불’이며, 수블>수울>수을>술로 변천해왔다.
물이 누룩에 의해 발효돼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신기하게 여긴 옛 사람들이 물에 불이 붙었다
하여 ‘수불’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발효 음식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 술의 역사는
고조선을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에 누룩과 술 빚는 방법을
처음으로 전했는데, 지금도 일본에서는 주조술을
전한 백제 사람 수수고리를 주신酒神으로 모시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가정·계절별 용도에 따라
양조 방법이 다양해져 술 종류가 3백여 가지에 이르렀다.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는 금주령이 시행되기도 했지만,
주조술은 끊임없이 발전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술 문화를
이뤘다.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술을 쌀로 만들었기에
쌀이 곧 밥이요, 술이었다. 술을 단순히 취하기 위한
기호음료가 아닌 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
하지 않고 ‘먹는다’라고 표현했다.
또 다섯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룬 술을 좋은 술이라 여겼고,
음식과 마찬가지로 과하지 않게 먹었다.
우리나라 전통 술 문화의 또 다른 독특한 특성은
지역 중심의 공업적 양조를 발달시킨 다른 나라와 달리
‘집에서 빚어서 집에서 마시는’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이런 가양주 문화는 반주 문화의 토대가 되었다.
‘주법’을 아십니까?
반주는 술을 즐기는 한편 음식과의 궁합을 따져
음식의 맛을 돋우고 소화를 돕는다. 반주의 양은
한 잔을 넘지 않는 것이 적당하다. 우리 조상들은
평상시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도록 당도를 높여
술을 빚는 지혜를 발휘했다.
술을 마실 때, 일본은 순서나 절차 등 행위를 중요시하여
‘주도’라는 말을 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주례’ 또는
‘주법’이라 하여 예의와 범절을 중요하게 여겼다.
술은 하늘에 바치는 제물이자 병든 이의 혈기를
돋워주는 귀중한 약이며, 신성한 노동에 힘과 흥을
실어주는 귀한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술의 기능과 술 먹는 예절을 중시했던 우리
민족에게 술은 백약지장百藥之長(백 가지 약보다 으뜸)으로 통했다. 현대에 와서 우리 술의 과학적 효능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국내의 한 주류 연구소는 전통 누룩이
염증 유발 물질인 나이트리트와 인터류킨(IL)-6의 생성을
막아 암세포의 이동과 이동 경로 생성 효소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신라대학 연구팀은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지게미의 발효층에, 고혈압 유발
효소를 저지하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팀은 막걸리를 적당히 마실 경우 손상된
간 조직을 회생시키고 혈류를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시름을 잊으려 마신 술, 시름을 더하다
하늘에 바치는 제물이자 약이었고, 풍류를 돋운
음식이었던 우리의 전통 술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을 폈던 일제는
가양주를 금지하는 주세 정책을 실시해 민가에서
빚어오던 전통주의 명맥마저 끊어버렸다. 이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소주, 맥주, 양주 등이 술자리를
점령했다. 공장에서 술을 생산하는 속도를 따라잡으려는 듯
우리의 술 문화도 2차, 3차 자리를 옮겨가며 끝을 보는
습성이 생겼다. 약주라 불린 우리 전통 술도 과하면 문제가
생기는데, 화학적으로 주조한 술을 무작정 마실 경우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란 더 말할 것도 없다.
만성적으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기억력이 감퇴되고
인지 능력이 저하되는 증상을 보인다. 미국 콜로라도 대학
보건과학센터 연구진은 그 이유를 학습하고 기억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 부위가 위축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술을 상습적으로 많이 마시는 남성 그룹의 경우
술을 마시지 않는 남성 그룹에 비해 해마 용적이 현저히
작다. 자기공명 영상기기 촬영을 통해 술 자체가 해마를
손상시킨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었다.
슬픔과 시름을 달래기 위해 마신 술이 나쁜 기억이나
감정을 더욱 오래 지속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취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술의 에탄올 성분은 음주 전의 기억을
오히려 더 오래 고착시킨다. 반면에 술을 마셨을 때 느끼는
일시적 희열감은 쉽게 잊혀진다.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술을 마시는 것보다 그 기억을 밀어낼
긍정적인 기억을 새로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한 해의 시름을 한잔 술로 털어버리고, 소원했던 관계도
회복하기 위해 술자리를 자주 찾게 되는 시기다. 자취를
감추었던 우리 술의 복원과 함께, 술을 마시지 않고
‘먹었던’ 우리의 멋스러운 술 문화도 함께 살아난다면
건강한 한 해의 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힐링페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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