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으면 5분, 10분 간격으로 경찰이 잠자는 이를 깨우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키며, 신문과 포스터 쪼가리들을 담요 삼아 추위를 견디던 매춘부는 새벽이 오면 차 한 잔과 담배 한 가치를 위해 몸을 판다…” 조지 오웰이 그린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밤 풍경이다. 대공황 직후, 어디서나 궁핍이 파스텔 번지듯 묻어나던 시절이었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런던은 변함없이 분주하고 복잡했다. 갈수록 영악해지는 도시의 상업적 활기 때문일 것이다. 오웰이 노숙자로 밤을 새던 트라팔가의 악사들과 보도블록의 화가들은 예외 없이 걸인이었다. 구걸행위가 아직 범죄였던 때, 그들은 불협화음의 가락을 되는대로 읊조리거나, 제멋대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보도블록 위에 무언가 그리(는 척하)며 예술가행세를 했다. 오늘날 런던의 걸인들은 세련되고 당당하다. 정규직과 프로의 무대에서 밀려났을 법한 연주자, 화가, 연기자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반면, 빈손 외에 아무 내놓을 것 없는 ‘전통적’ 걸인들은 그 수도 훨씬 늘었고, 구걸행위마저 전문화, 상업화, 계층화되면서 이제 궁핍은 그들에게 더욱 잔인한 형벌이 돼가고 있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집권당은 수치를 흔들며 부채삭감과 일자리창출의 성과를 강변하지만, 거리에는 무시간계약(zero hour contract)ㅡ언제고 해고가 가능한 노동계약ㅡ에 목매는 청년들이 넘치고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오늘도 줄어들 줄 모른다. 누가 말했던가, 진정 현실만큼 강한 통계는 없는 듯하다.
영국은 신자유주의의 첨병답게 그 폐해 또한 가장 극명하게 경험하는 나라다. 대공황 이후 최대였다는 최근의 금융위기가 보여주듯 원천적으로 불안한 금융을 차치한다면, 오늘날 제조업이 급속히 쇠락하는 영국의 내수를 받쳐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외국인 관광이다. 공공요금과 물가는 터무니없이 높고, 파운드는 여전히 강세이고, 집세는 천정부지로 치솟을지라도, 관광은 갈수록 호황이다. 관광자원의 저력일 것이다. 도처에 크고 작은 공원과 정원들, 전국에 산재한 저리도 다양한 박물관과 화랑들, 고색창연한 건축물, 유물, 거리들…. 모두 누대에 걸쳐 세밀하게 관리되고 보존되어 온, 그 자체가 복지국가와 더불어 거대한 공공재의 성채를 이룬다. 영국의 정치가 살아서 작동한다는 증거는 신자유주의의 기승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단기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사익체계에 맞서는, 공공재의 저 장구한 축조에서 먼저 엿볼 수 있다.
욕먹지 않는 정치, 어디 있으랴만, 그래도 정치에서 급(級)은 엄연하다. 가령 정치가 일정한 역할을 감당해온 나라와 가장 초보적인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차원이 다르다. 정치인의 도덕적 자질을 따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정책검증을 해야 선진정치라는 볼멘 소리를 해대지만, 선진국 정치인의 검증이 정책에 초점이 맞춰진 이유는 도덕적으로 문제될 만한 사람들은 애초에 후보군에서 제외되는 것이 상식화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영국의 보수당, 노동당의 두 거물정치인이 도덕성의 문제로 사실상 정치생명을 마감했다. 기자로 위장한 인터뷰어에게 자신이 ‘현직에서 물러나면’ 특정 기업에 이러저러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과시성 발언을 한 것이 문제였다. 현직과는 전혀 무관한, 완벽히 합법적인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론과 여론의 집요한 성화에 평생의 정치적 여정을 단번에 중단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의 어떤 언론도 ‘기자 사칭’의 도덕성은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핵심은 한 나라의 공공재를 책임질 정치인의 도덕성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있었던 현직 총리와 야당 당수의 TV 토론도 흥미롭다. 질문자는 송곳 질문으로 유명한 방송앵커 제러미 팩스만이었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답변을 안 하고 있다.” 한 인터뷰어에게 열두 차례나 같은 질문을 한 전력이 있던 그가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승자는? 언론은 이번에도 두 당 대표 중 하나가 아니라 팩스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국의 지난 총리청문회(인터뷰가 아니다)와의 대비가 단계 단계마다 너무도 극명해서 차라리 허망해진다. 당시 한국 언론은 후보자의 자질을 파헤치는 당사자라기보다는 청문회 통과여부를 점치는 관전자 내지 해설자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 내 기억이다. 케인스가 대공황으로 민주주의마저 위기에 몰리던 상황에서도 영국정치에 대해 끝끝내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영국정치인이 정책적 계몽의 순진한 대상일지언정 도덕적으로는 아직 신뢰할 만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 숱한 수치와 모멸을 가공할 뱃심으로 버티며 결국 총리직을 거머쥔 당사자도 그렇지만, 할 만큼 했다는 듯 ‘의연히’ 그를 맞이한 우리 정치권 또한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한국 정치문화는 뭉텅뭉텅 뒷걸음질 칠 것이다. 경제도 정치도 한국에선 정말 독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그렇게 부와 권력을 움켜쥔 독한 사람들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유유상종의 세상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솔직히 그런 내 신세가 먼저 딱하다.
고세훈(고려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신이라면 (0) | 2015.05.07 |
---|---|
공무원연금법 개정을 보는 소회1 (0) | 2015.05.07 |
어느 14세 소녀의 죽음으로 본 가정과 국가 (0) | 2015.04.07 |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왜 (0) | 2014.12.09 |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0) | 2014.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