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가문에는 병역 잡음이 거의 없다. 대학 재학 중 입대를 당연시 하는 가풍(家風) 때문이다. 구자경 명예회장 형제들부터 줄줄이 군대를 갔고, 구본무 회장의 4형제도 모두 현역으로 복무했다. 따라서 LG만큼 ‘졸면 죽는다’ ‘줄을 잘 서라’는 군대 격언에 익숙한 그룹은 없을 듯싶다. 그럼에도 LG전자가 이런 교훈을 깜빡해 죽을 고비를 넘긴 건 아이러니다.
지난해 1월 말 삼성전자 최지성 부회장(당시 사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고해성사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옴니아에서 두 가지 전략적 미스를 범했다. 첫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모바일 운영체제(OS)를 맹신했다. 사용자 편의보다 기술 측면에 매몰돼 감압식 LCD를 채택한 것도 문제였다.” 삼성은 곧바로 구글의 안드로이드 진영으로 줄을 바꿔 섰다. LCD도 아이폰처럼 정전식 스크린으로 갈아탔다. 삼성은 두 달 뒤 이건희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하면서 ‘속도경영’까지 되살아났다. 갤럭시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만난 LG전자 임원의 말은 뜻밖이었다. “요즘 영어 공부하느라 죽겠다”고 했다. 당시 LG전자는 핵심 임원의 절반을 외국인이 차지해 모든 회의를 영어로 진행했다. 한국 임원들끼리 몰래 우리말로 다시 회의를 열 정도였다. 혹시 영어 단어를 잘못 알아들었는지 맞춰 보면서…. 외국인 임원의 입김이 세지면서 마케팅과 디자인에 무게가 실렸다. 제조업체로서 지켜온 기술개발과 품질관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스마트폰 혁명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LG전자는 밤새워 영어 공부를 하느라 졸기만 했다.
LG전자는 줄도 잘못 섰다. 삼성전자와 달리 끝까지 MS에 줄을 섰다. 컴퓨터용 OS를 휴대전화에 구겨 넣은 윈도 모바일은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줄을 잘못 선 대가는 혹독했다. 휴대전화 세계 3위의 LG전자는 스마트폰에서 대만의 HTC와 국내의 팬택계열에조차 밀려났다. 3조원의 영업이익은 적자로 돌아섰다. 딱 1년 만에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한 것이다.
LG의 두 기둥은 전자와 화학이다. LG화학은 요즘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안정성과 성장성을 고루 갖춰 시가총액이 31조원을 넘었다. 어제 오창 배터리공장 준공식엔 이명박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LG전자는 줄곧 LG화학보다 시가총액이 두 배가량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LG화학의 반토막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LG전자가 못 일어나면 LG그룹의 미래는 없다. 현대차그룹이 차지한 국내 2위 그룹의 위상을 되찾기도 어렵다.
구본무 회장은 얼마 전 좋아하던 술을 딱 끊었다. 온화한 화법도 달라졌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 “더 치열해져야 한다” “자나깨나 연구개발, 품질은 결코 양보 말라”…. 강도는 세지고, 빈도는 잦아진 구 회장의 어록에는 위기의식이 묻어난다. LG전자 지휘봉은 지난해 말 전문경영인에서 오너 일가인 구본준 부회장에게 넘어갔다. 외국인 임원 5명은 모두 내보냈다.
얼마 전 LG전자는 삼성전자와 3D TV를 둘러싸고 험한 말을 주고받았다. 언론들은 “일류기업끼리 왜 그러느냐”고 타박했지만 필자의 생각은 정반대다. LG전자에서 모처럼 결기, 시쳇말로 독기(毒氣)가 느껴져 좋았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 가족까지 나서 “욕을 먹고 왜 참느냐”며 성화가 대단했다고 한다. LG전자는 결국 내용증명을 발송하고 사과 서한까지 받아냈다. 오랜만에 똘똘 뭉치는 분위기다.
물론 LG전자의 화려한 부활은 아직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LG는 소재·부품에서 완제품까지 대단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삼성에 버금가는 탄탄한 하드웨어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단지 기업실적만으로 LG전자의 부침을 판가름한다면 너무 단순한 접근이다. 여기에는 전문경영과 오너경영의 차이, 글로벌 경영과 토종 경영의 장단점, 한국 특유의 선단식(船團式) 그룹의 저력이 어떤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관전 포인트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LG전자부터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철호 joins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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