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숙직중 네이버에서 찾은 것입니다.
orial1334 (2007-02-26 19:28:39)
항상 국가를 위하여 수고가 많으신 두산백과사전 운영자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위의 올려주신 기계유씨에 대한 글은 작성된지 오래되었으며, 더구나 기계유씨의 실제 약사와 많이 다른 부분들이 있어 아래와 같이 우리 기계유씨의 약사를 올려드리오니 이글로 수정 대체하여 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기계유씨(杞溪兪氏) 약사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시조는 유삼재(휘 三宰)다 신라때 좌아찬이란 벼슬을 하였는데 자세한 것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그 후손에 유의신(휘 義臣)이란 분이 신라가 망하매 고려에 복종하지 아니하니 고려 태조가 미워하여 기계호장으로 좌천하였다. 그후 유의신(휘 義臣)공의 후손들이 기계인이 되었는데 신라시대 기계유씨(杞溪兪氏) 세거지인 경북 포항시 기계고현에 시조 유허비가 있다.
그리하여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까닭에 고려전기에는 여러 대 은둔 생활을 했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그 후손의 일족이 경기도 남쪽지방에 이주하면서 다시 벼슬에 뜻을 두어 득선(得瑄 좌복야), 선(僐 봉익대부판도판서), 승계(承桂 봉익대부판도판서) 3대가 크게 현달하여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승계(承桂)가 아들 천경(千慶 전서), 성리(成利 군기시사), 성보(成保 부정), 성복(成福 판사재감사) 등 4형제를 두어 번창했으나 마침내 고려가 망했다.
조선 초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낸 분은 성리(成利 군기시사)의 손자 유효통
(孝通)이다. 그는 정인지와 같이 중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종시대 집현전의 제학이 되었으며 노중례와 함께 『향약채집월령』등을 약술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약용식물을 맨 처음 정리한 의서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장자 목로(牧老)의 부인이 영의정 황보인의 딸인 관계로 황보인이 수양대군당에 의해 참변을 당한 뒤 유효통(孝通)일가도 박해를 받았다.
이때 사육신이 한사람인 유응부(應孚 忠穆公. 증병조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 평안도 절제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는데 세조를 제거하고 억울하게 쫓겨난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세조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에 이른 학촌 유진(鎭)은 역학에 정통하였다. 또 유호인(好仁) 은 성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에 뽑히여 관이 교리, 장령에 이르렀다. 그는 점필재(김종직)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고, 시문에 능했으며 명필로도 이름을 떨쳤다. 더욱이 효성이 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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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복(成福)의 손자요, 유효통(孝通)의 재종제인 유해(解)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동서간이다. 그는 일찍이 세종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24세에 조졸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기계유씨(杞溪兪氏)를 명문청족으로 발전시킨 것은 사실상 유해(解)의 자손들이었다.
그의 아들 유기창(起昌)은 성삼문과 이종 4촌인 관계로 화가 인척에 미처, 젊어서는 이리저리 도피생활을 하다가 성종때 무과에 급제 여러 지방관을 거쳐 첨지중추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산조말 왕의 난폭한 정치를 극간하다가 죽은 영의정 성준의 친당으로 몰려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중중반정 후 조정에서 병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생을 마치니 세상에서 연산때의 4절신이라 일컬었다. 후에 충청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비인에 청절사를 창건하고 유기창(起昌)과 그이 아들 정당 유여림(汝霖)을 같이 배향하여 그 청덕을 추모했다.
정당 유여림(汝霖)은 그의 아우 유여주(汝舟)와 더불어 중종때 이름난 명신이요 명사였다. 정당 유여림(汝霖)은 연산때 문과에 급제, 중종반정 후 벼슬길에 나서 사간이 되었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심연원 등과 함께 조정암(광조)과 더불어 같이 처벌해 줄 것을 계하다 파직되었다 그 후 형조판서가 되었을 때 김안로의 죄를 논핵하다 도리어 파직되어 향리로 추방되었다. 7년 후에 그는 다시 기용되어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별세했다.
정당 유여림(汝霖)은 천성이 담박하고 부귀영화를 꺼려 7년간의 은둔 생활을 할 때도 평범한 촌노와 같았다 한다.
정당 유여림(汝霖)의 아우 유여주(汝舟)는 중종때 조정암(광조)이 주장하여 설치한 현량과에 선발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향리인 비인으로 낙향하여 다시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여주(汝舟)는 아호를 선취처사 또는 임벽당(林碧堂)이라 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의 아호가 임벽당(林碧堂)인 연유로 임벽당김씨(林碧堂金氏)라 하는데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 3대 명원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유여림(汝霖)의 아들 유강(絳)은 호조판서 숙민공(肅敏公)이요, 그의 손자요 유강(絳)의 조카인 유홍(泓)은 좌의정 충목공이다.
유강(絳)은 중종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로가 순탄치는 못하였다. 그는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라 당시 외척 권신인 윤원형을 논핵하다. 여러번 지방관찰사로 축출되고 또 위험한 지경을 넘기기도 했는데 윤원형이 죽은 후 중앙에 복귀하여 한성판윤, 형조판서, 호조판서가 되었다. 유강(絳)은 스스로 30년 입조에 한번도 권세 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음을 말하면서 이와 같은 몸가짐을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겼다.
유홍(泓 충목공 좌의정)은 명종때 문과에 급제 한림, 전랑, 삼사를 거쳐 충청, 전라, 함경, 평안도 등 5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임진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로서 입상하여 좌의정에 이르렀다. 또 광국일등, 평난이등의 공훈으로 기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문에도 능했다. 유홍(泓 충목공 좌의정)이 일찍이 과거의 시관이 되었을 때 응시자 중 율곡 이이의 답안이 문과 소과에서 모두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채점을 한 시관회의에서 모든 시관들이 들고 일어나 이이는 지난날 불문에 들어갔던 과오가 있으므로 장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홍(泓 충목공 좌의정)은 \"옛날 성현들도 젊은 날의 과오는 모두 있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이의 젊은 날의 일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오히려 여러분의 잘못이 더 크다\" 고 논박하여 마침내 율곡 이이를 장원으로 뽑았다. 유홍(泓 충목공 좌의정)은 이만큼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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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림(汝霖)의 증손중에서 유대수(大脩 문과장령), 유대진(大進 문과참의) 유대정(大禎 문과참판), 유대경(大儆 문과군수), 유대건(大建 문관대사헌) 등이 더욱 출중하여 선조조와 광해조에 걸쳐 각각 크게 활약했다.
광해조와 인조조에 걸쳐서는 좌의정 유홍(泓)의 손자 유백증(伯曾 이조참판, 충경공)과 호조판서 유강(兪絳)의 증손 유성증(省曾 강원도관찰사)이 직간과 충의로 이름을 떨쳤다.
유백증(伯曾)은 광해조 초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난정에 벼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폐모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3등공신이 되고 사간에 특배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논핵과 직간은 조정을 진동시켰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협수사로서 대신들의 오국을 통박하며 척화를 주장했다. 그의 척화주장은 청사를 죽이자고 할 정도로 격렬했다.
관이 이조참판에 이르고 영의정에 가증되었다.
유성증(省曾)은 광해조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광해말년에 호조좌랑으로서 이이첨을 공박하는 영남유생들의 소를 대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하옥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지평이 되고 승지로 승진, 병자란때는 강화의 파수대장으로 분전했다. 이어 참의 도승지등을 거쳐 관이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유성증(省曾)의 두 아들 유황(榥 봉주)과 유철(㯙 취옹)그리고 그의 재종질 유계(棨 市南)는 인조 11년 같은 해에 모두 문과에 급제 했다.
유황(榥)은 월사 이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병자호란 때는 정언으로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척화를 주장했다. 또 청이 척화신들을 압송하려고 할 때 이에 자원하기도 했다. 그는 척화로 말미암아 단양에 유배되고 관이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유철(㯙)은 병자호란때 이조좌랑으로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그 후 누진하여 39세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성망이 높았으나 대사간으로 서변옥사에 대해 진언하다가 효종의 진노를 샀다. 현종조에 다시 복관되어 경기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거쳐 관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유계(棨)는 신독재 김집의 문인으로 호를 시남(市南)이라 하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등과 더불어 세칭 충청도 산림오현이라 일컫는다. 병자호란 때는 척화를 주장하다가 임천에 유배되고 효종초에는 인조의 시호문제로 종성에 유배되었다. 방면 후 학문과 저술에 전심하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가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현종 초 예론시비에는 송시열과 동조했다.
유계(棨)는 도덕, 절의, 학문 문장에 있어 세인이 추앙을 받았다.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고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강거문답, 가례원류, 여사제강, 시남집등이 있다. 다음 숙종조에서는 유헌(櫶 참판), 유명일(命一 문과부윤), 유하익(夏益 예조판서), 유하겸(夏謙 문과승지), 유명웅(命雄 좌참찬), 유명홍(命弘 예조판서), 유명응(命凝 경상도관찰사)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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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계인(杞溪人)의 명성을 더 한층 빛낸 시대는 영조시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유척기(拓基 문익공 영의정)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영조 15년에 우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 이르러 영조 중흥사업의 주역이 되었으며 30년간 노론 집권당의 영수로 임했기 때문이다. 유척기(拓基)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질 유언호(彦鎬 忠文公, 좌의정), 서(壻) 윤시동(우의정), 조동회(이조판서) 등을 통하여 정조시대 노론 청류파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척기(拓基)의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다.
영조시대 유척기(拓基)와 쌍벽을 이룬 유최기(最基)는 그의 종형이다. 유최기(最基)도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이 깊고 시문에 능하여 영조가 항상 유신으로 대우했다.
또 영조시대에는 기계문중에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유건기(健基 참판), 유우기(宇基 승지), 유언술(彦述 대사헌), 유언국(彦國 참판), 유언민(彦民 대사헌), 유한소(漢蕭 함경도관찰사) 등이 크게 활약하였는데 특히 유언술(彦述)은 시문과 직간으로 이름을 떨쳤다.
영조시대에 이어 정조시대에도 기계유씨(杞溪兪氏)의 황금시대는 계속되었다. 정조시대 노론 청류파를 주도했던 유언호(彦鎬 충문공 좌의정)을 비롯해서 유한모(漢謨 형조판서), 유악주(岳柱 대사간), 유한인(漢人 장령), 유한령(漢寧 예조참의) 등이 활약했고 한편 학계에서는 대재 유언집(彦鏶 이조참의), 저암 유한준(漢雋 형조참의)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유언호(彦鎬 충문공 좌의정)는 호당에 뽑힌 준재일 뿐 아니라 백부 유최기(最基), 당숙 유척기(拓基)의 후광을 이어받아 정조 초 새로 설치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규장각의 직제학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또 그는 개성유수로 자원해 가서 곤궁에 빠진 연암 박지원을 구해준 일도 있다. 그는 정조의 문화정치에 큰 공을 세워 정조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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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순조 조에서 조선조말까지 왕권은 쇠퇴해 지고 대신 외척세도정치가 등장하여 나라의 형편은 기울어 갔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해 가며 유장환(예조판서), 유치숭(형조판서), 유진오(兪鎭五)(좌찬성), 유성환(판서), 유치선(공조판서) 등을 비롯해서 그밖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서 조선조 명문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리하여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98인, 상신(정승) 3인, 판서 12인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계유씨(杞溪兪氏)는 학문에서 더욱 그 빛을 발휘하여 조선중기 이후 혁혁한 연원을 계승하고 있다. 시남 유계(棨)를 비롯하여 자교당 유명뢰(慈敎堂 命賚), 겸산 유숙기(兼山 肅基),대재 유언집(彦鏶 이조참의), 저암 유한준(漢雋 형조참의),봉서 유신환(鳳捿 莘煥) 등은 조선중기 이후 국학과 후진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시남 유계(棨)는 사계 신독재의 문인이나, 율곡이 학문을 추앙하여 독특한 학풍을 확립하였고, 유명뢰(命賚),는 우암의 문하에서 겸산은 삼연의 문하에서 유언집(彦鏶)은 도암의 문하에서 유한준(漢雋)은 뢰연 지암의 문하에서 그리고 유신환(莘煥)은 노주의 문하에서 각각 학문을 닦아 대성한 학자들이다.
또 서화에 있어서도 유한지(綺園 漢芝), 유치봉(霞山 致鳳), 유창환(愚堂 昌煥), 유진찬(蒼史 鎭贊) 등이 각각 독자적인 개성의 세계를 이루었다. 유한지(兪漢芝)는 전(篆), 예(隸)에 있어 능했으며 유치봉(霞山 致鳳)은 산수에 또 유진찬(蒼史 鎭贊)은 매화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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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천하면서 구체제를 부정하고 우리나라에 신지식과 개화사상을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이는 유길준(矩堂 吉濬)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의 유학생이며 한국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여 현대문으로 서유견문을 저술하였다. 또 내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하였으나 12년의 망명에서 귀국해서는 교육과 계몽사업에 전념했다. 저서에 『서유견문』,『유길준전서』(兪吉濬傳書)가 있다.
그밖에 유기환(외무대신 箕煥), 유성준(내무협판) 등이 한말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일제시대에서 해방초에 걸쳐서는 유진태(조선일보사장, 조선교육협회장), 유정근(임정요인, 15년 복역후 옥사), 유일준(의학박사, 경의전교수), 유만겸(충북지사, 경학원부제학), 유억겸(연대총장, 문교부장) 등이 크게 활약했다. 특히 유진태와 유정근은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헌신했다.
이상으로 기계유씨(杞溪兪氏)를 빛낸 사람들의 일부를 열거했다. 기계유씨(杞溪兪氏)의 가풍에 대해서 유진오(현민 兪鎭午)는 유치웅(서예가, 기계유씨 최후의 문장)이 편한 『기계문헌』서문에서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자고로 청족이라 세상에 일컬어 왔는데 사실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상할 정도로 탐관오리의 추명을 남긴 이가 드물다. 매사에 중용을 집하여 대체로 조촐한 선비의 규구(規矩)를 넘지 않은 것이 시조 이래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전통인 것이다. 권세를 일족의 수중에 모으고 국정을 좌지우지한 적이 없으므로 평범한 역사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랑할 만한 평범이요, 천양(闡揚)되어야 마땅한 역사 이었다』고 자찬하고 있는데 객관적으로도 기계유씨(杞溪兪氏)는 그렇게 청족으로 평가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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