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에 대한 우리의 의견

대한민국의 역사?(8)

지성유인식 2009. 7. 1. 18:17

 

‘풍납토성, BC 2세기 축조’ 탄소 연대 측정도 무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이하 위원회)란 조직이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자 한·일 정상의 합의로 2002년 발족하여 2005년까지 활동했던 조직이다. 물론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었다. 위원회는 2005년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이하 보고서)를 발간했다. 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장래 양국 역사교과서 편수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사 교과서가 <보고서>의 내용을 참고해 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고서>의 어떤 내용들은 과연 한국 학자들이 이런 글을 썼는지 의아한 부분이 적지 않다. <보고서> 제1권의 ‘고구려의 정세’ 부분을 보자. 고구려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 “고구려는 3세기 후반 서천왕 때에 이르러 각 지역에 온존하던 고유명부(固有名部)를 일소함으로써 연방제적인 초기 고대국가를 벗어나 왕과 중앙 귀족에 의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58쪽)라고 제13대 서천왕(270~292) 때에야 사실상 건국되었다고 기술했다. 종래의 정설이던 태조대왕(53~146) 때보다도 150년 이상 후퇴한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가 봤다면 “나는 왜 이렇게까지 주장 못했을까?”라고 한탄하면서 직접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나의 애제자라고 감탄했을 글이다. 백제로 가면 한 술 더 뜬다. <보고서>의 ‘백제의 정세’ 편을 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27년(260)조에 6좌평 및 16관등제 등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완비했다고 나오나, 이는 후세 백제인들의 고이왕 중시 관념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다. 이 시기 백제의 발전 정도는 좀 더 낮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59쪽)

 

이병도는 <삼국사기> 고이왕 27년(260)조의 6좌평 및 16관등제 등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완비했다는 기록을 고대국가 성립의 근거로 삼았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이것도 일제가 창안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의 아류로서 아무런 학문적 근거는 없다. 그런데 <보고서>는 <삼국사기> 고이왕 27년조의 이 기사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3세기 후반에 백제의 왕성인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축조되었다”라고 서술했다. 국립문화재 연구소는 2000년에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13점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을 해 그 중심 연대가 빠른 것은 서기전 199년에서 늦은 것은 서기 231년이라고 발표했다. 풍납토성이 이미 서기전 2세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000년에 이미 이런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으나 2005년에 국민의 세금으로 발간된 <보고서>는 ‘3세기 후반에 축조되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는 백제는 “346년에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침류왕 원년 및 2년(385)에 백제 왕실이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전후한 시기에 고대국가 체제가 완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60쪽)고 서술했다. 백제가 근초고왕(346~375) 때 건국되었다는 주장으로, 이병도의 고이왕 27년(260)설보다도 100년 정도 더 후퇴한 것이다. 현재 주류 사학이 이병도보다도 후퇴한 배경을 찾으려면 역시 쓰다 소우키치를 주목해야 한다. 그가 1921년에 쓴 ‘백제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재’(百濟關日本書紀記載)는 현재는 쓰다 소우키치 전집 제2권에 ‘백제 왕실의 계보 및 왕위 계승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재’(百濟の王室の系譜及王び王位の繼承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는 <일본서기>에 근초고왕이 초고왕(肖古王), 근구수왕이 귀수왕(貴須王)으로 나오므로 이들부터는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 국왕들은 <일본서기>에 등장해야 실존 인물이 된다는 것이다. 쓰다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계왕(契王) 이전의 백제에 관한 기사는 모두 사실로 믿기 어려운 것이고, 그것은 후세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만들어진(構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2대 계왕(344~346) 이전의 <삼국사기>가 조작이라는 주장이니 13대 근초고왕부터 실재 인물이 된다. 쓰다의 다른 글도 그렇지만 이것도 아무런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그러나 쓰다의 이런 주장을 2005년의 <보고서>가 그대로 부활시킨 것은 한국 주류 식민 사학계의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가 아니라 쓰다 소우키치라는 자기고백에 다름 아니다. <보고서>는 또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원인이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던 중국 망명자들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백제가 빼앗으려고 한 것도, 고구려가 막으려고 한 것도, 바로 그들의 선진 문화와 기술인력이었다”고 주장했다. 한사군 재한반도설의 토대 위에 미개한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수한 중국 문화를 빼앗기 위해 전쟁했다는 황당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이 지역을 ‘무리하게 직접 통치하기보다’ 동수(冬壽) 같은 “중국 망명객을 대표자로 내세워 그들의 막부조직을 통해 간접 통치하였다”고 주장했다. 평안·황해도 지역이 중국 망명객들이 다스리는 막부의 자치 지역이었다는 희한한 논리다. 물론 이 시대 막부가 존재했다는 단 하나의 사료적 근거도 없다.

 

<보고서>의 시각대로 평안·황해 지역의 중국인들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백제의 선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쟁은 고구려의 선공으로 시작된다. 고구려는 왜 중국인 망명객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싼 방법 대신 그들을 지키기 위해 백제를 수없이 먼저 공격하는 비싼 전쟁을 치렀는지 의문도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보고서>는 “그 당시 고대국가 백제의 남쪽 경역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사는 <일본서기> 신공 49년조 기사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쓰다 소우키치처럼 <일본서기>만이 한국사 해석의 유일한 잣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초기 기록이 허위라는 사실은 다른 인물도 아닌 쓰다 소우키치도 주장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60년 단위로 끊는 ‘주갑제’(周甲制)를 동원해 해석해야 한다. <일본서기> 진구(神功)황후 섭정 55년(서기 255)조에 “백제의 초고왕이 훙(薨)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이 375년 사망했다고 기록해 두 갑자(甲子) 120년의 차이가 난다. <일본서기>의 귀수왕(貴須王) 사망 연대(264)도 <삼국사기>의 근구수왕 10년(384년)조보다 120년 차이가 난다. <일본서기>는 주갑제를 적용해 <삼국사기>와 비교해서 그 정확한 연대를 감별해야 하는 책이다. 그러나 <보고서>는 되레 <일본서기>만이 유일한 잣대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신라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결국 신라는 4세기 후반 나물이사금 때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초기 고대국가를 이룩할 단서를 잡았으나 고구려의 간섭 속에 이루지 못하고, 5세기 전반 눌지마립간 때에 와서 단위 정치체인 6부를 왕권에 종속적으로 연합하여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였다.”(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64쪽)

 

이병도가 17대 내물왕(356~402) 때 신라가 사실상 건국되었다고 서술한 것을 부인하고 19대 눌지왕(417~458) 때 건국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이병도의 주장보다 50여년 후퇴한 것이다. <보고서>는 왜 굳이 눌지왕을 신라의 건국시조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역시 쓰다 소우키치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 답이 나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402∼417) 때에도 명백한 허구로밖에 볼 수 없는 기사가 있기 때문에, 그 앞선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 때, 즉 우리 군(軍: 일본군)이 처음으로 신라를 압박했다고 추측되는 시대의 기사도 다른 확실한 사료의 기록에 조응(照應)하는 것이 아닌 한 신용할 수 없다.”

 

<삼국사기> 18대 실성왕 때의 기사에도 허구로 보이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19대 눌지왕 때부터야 사실로 볼 수 있다는 쓰다의 주장은 ‘5세기 초반 눌지마립간 때 신라가 초기 고대국가가 되었다’는 <보고서>의 기술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고학에서는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고 철제 무기가 등장하면 고대국가가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계급 분화의 흔적이 있고 철제 유물이 출토된 경주 조양동 유적은 서기전 1세기~서기 1세기 전후의 유적으로 해석한다. 이때 이미 국가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서기 5세기께에야 신라가 건국되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버젓이 주장하는 것이나 <보고서>가 쓰다 소우키치의 주장을 그대로 되살리고 있는 것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이 대한민국 주류 사학계에 그대로 계승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관들이 세금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교육부는 언제까지 자국사에 대한 테러행위를 국민 혈세로 지원할 것인가. 마치 ‘이래도 세금 낼래?’ 하고 국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나의 기억에는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죽은 논개는 관기로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은데,
지금은 관기가 아닌 경상우병사증좌찬성 최경회의 부실(첩)로 인정되고 있다.

그와 관련한 근거로 다음의 백과사전과 장수군청의 주논개생가터관리소장 전옥렬님의 최경회 장군의 문중 족보에 정식 기록되어 있는데 양반가의 족보에 관기가 올라가는 것은 문중의 수치로 여기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관기가 아니다.

다음백과사전
전략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는데, 최경회를 의미하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慶尙右兵使贈左贊成崔公諡狀)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且其副室 公死之日 盛服婆娑於江中巖石 誘賊長因而俱墜死 至今人稱義巖)
이것을 근거로 논개가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알려진 것이다.
추측컨데 논개님의 모친이 관기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고,
따라서 논개님도 관기로 있다 최경회장군의 눈에 띄어 부실이 되어 관기를 벗어 난 것으로 여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