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외교·독재 넘어 오늘, 생존 저항으로
황석영(소설가) ‘다시 6월의 광장’에서] 44년 전…21년 전…그리고…
‘강부자’부터 ‘쇠고기’까지 총체적 위기…국민 어떻게 섬기나
1965년 ‘한-일 굴욕외교’ 맞서 거리로…
6월항쟁땐 직접선거·민주화 성과 얻어
이제 세 번째의 6월을 맞으면서 착잡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첫 번째는 우리가 1964년의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나섰던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6·3 동지회장도 지냈고 당시에 고려대 주동자로 나섰다가 6개월의 실형을 살기도 했지만, 나는 이름없는 시위자의 한 사람으로 청와대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었던 광화문 저지선 앞에 서 있었다. 당시의 구호가 생각난다. 굴욕외교 반대, 한일회담 철회하라! 당시의 군사정권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종자돈으로 일본의 전후배상금이 긴요했을 테지만, 일본은 교활하게 ‘건국축하금’으로 조약을 한정지으면서 이후의 청구권을 마감했다. 따라서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었으므로 한일 간에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문제가 불거졌으며 근년에는 적반하장 격으로 한일합방의 정당성까지 들고나올 정도다. 청구권이 애매모호하게 일단락되면서 수십만의 징용자와 정신대 등의 일제 전쟁 피해자들의 배상권이 사라져 버렸고 이는 무수한 양민들의 평생에 걸친 한이 되었다.
두 번째는 1987년 6월 항쟁 때에 동료 문인들과 더불어 도심지의 시위에 참가했던 일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광주 학살을 통하여 체육관에서 집권한 뒤에 정권 연장을 위하여 호헌선언을 했던 것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이었다. 우리는 이 항쟁을 통하여 직접선거와 형식적 민주화라는 성과를 얻어냈으며 ‘시민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얻게 된다. 당시의 구호는 이러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민주화 이행기를 거쳐서 김대중 정부의 정권 교체를 지나 노무현 정부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부에 와서 일부에서는 지난 정권교체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이 바로 현정권의 자승자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미국이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재편성 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금융대란이 있었고 분단을 통하여 남북을 조종하려는 미국의 정책과 더불어 중동전쟁 참전이나 핵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일부 개혁적인 안간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국내외 정책에서 우왕좌왕하면서 김대중 정부 이후 심화된 신자유주의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었고 지지층은 이탈한다. 실업과 비정규직의 확산에다 부동산은 폭등하고 사회적 양극화가 현실로 나타나면서, 이제 궁극의 가치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변하면서 대중적 불안이 증폭되었다.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적 가치가 붕괴되고 이 불안을 잠재울 아무런 정치적 전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경제를 최우선으로 하는 대선을 치르게 된 것이다. 국민은 가치로부터 타락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고자 했던 것이다.
쇠고기·대운하·학교자율화…총체적 위기
민영화까지 밀어붙일땐 ‘정권퇴진’ 정당화
이명박 정부는 출발하면서 이념의 시대가 갔다고 했지만, 이는 사회통합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지난 정권 교체기를 이념적 좌파의 집권기로 이해하는 또 다른 이념을 은폐한 표현이었다. 진보측이 레프트니 라이트니 하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김대중 정권 이래로 노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려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또한 새 정부의 정체성으로 내세운 실용주의가 능률과 성과를 강조한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법으로 정한 여러 기관 단체장들을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일제히 나가라고 강박하는 것이 실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실용을 한편으로는 실학의 위대한 정신이었던 실사구시로 본다면, 정권의 자기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내각 구성과 권력 포진의 인재등용을 속칭 강부자 고소영 인사들로 채운 것은 실사구시의 기본 정신인 상식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서민대중이 대부분인 국민을 올바로 섬길 수가 있으랴.
연이어 대운하 기획은 한마디로 토목 경기를 일으켜 내수 경기를 활성화시키면서 한숨 돌릴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것인데, 임기 안에 정치적 부메랑이 되어서 이명박 정부의 숨통을 조르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운하가 지난 세기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전근대적 유통 수단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며, 현재의 한강변조차도 실패한 정비 작업이었음을 유럽의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삼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에서 운하의 실용성을 따질 필요도 없거니와 강바닥과 강변의 생태계는 국토가 생겨난 이래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산과 강이 이루어낸 굽이굽이의 자연 지형 역시 마찬가지다. 지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대동여지도를 보라. 인간의 취락과 산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지도이니까. 조선 왕조는 강과 바다를 적절히 이용하여 세곡을 한양으로 집결시킬 수 있었다. 중국의 자연을 역행한 대대적인 장강 댐 공사에 대하여 서구의 전문가들은 여러차례 지적한 바 있으며 환경적 위협은 세대를 이어서 진행될 것이라 한다.
어느 나라에나 위기 요소가 있고 정부는 이를 적절히 경영하면서 나라를 이끌어 간다. 일본의 리스크는 지진이며, 중국의 리스크는 수많은 사람과 다양한 종족이고, 우리의 그것은 북한이다. 북한에게 퍼주는 것이 아니라 경영하자는 것이다. 북한은 우리에게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을 조정할 수 있는 지렛대이자 거꾸로 그들이 남한을 조정할 수 있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 균형을 유지하면서 북한을 경영해 내야만 한다. 그야말로 이념적으로, 감정적으로 경영을 해서는 안 된다. 북미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되면서 북미 수교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동북아에 동서독 장벽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엄청난 세계사적 변화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 엄청난 변혁의 때에 새 정부는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잃어버린 십년이 아니라 지난 정부의 경험들을 연이어서 자기화하고 훨씬 통큰 동북아 경영에 뛰어들어야 한다.
‘잃어버린 10년?’ 현 정부 ‘자승자박’
지난정부 경험 바탕 동북아 경영 펼쳐야
그야말로 속좁은 운하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몸을 돌려 대륙을 바라보자. 경의선과 경원선 철도를 잇고 북과 이미 타결한 공단들을 활성화하고 해외에 나간 중소기업들을 유치해서 내수를 일으키면서 북미 수교에 이어 남북 수교를 이루어내야 한다. 조국통일이니 민족통일이니 그것은 현실에 아직 없는 그림이다. 유엔에 가입한 다른 나라로서 연합한다고 이미 약조를 했다. 평화체제 안에서 병력의 군축이 필수적이며 이는 우리의 경제활동 인력이 될 것이다. 나와 또 하나의 나가 서로 돕는 길이다. 이들을 데리고 러시아가 오랫동안 제안해 온 동시베리아 개발에 뛰어들며 내친김에 몽골에까지 나아가자. 바로 이러한 대륙에의 염원으로 본다면 대운하의 대 자가 얼마나 속좁은 잔꾀인가.
세계가 컨텐츠 전쟁을 하는데 그것의 기본이 책읽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교육과 학력평가의 기본을 독서의 역량에 두고 있다. 교육자율화라는 이름 아래 강화된 입시경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청소년들은 이제 겨우 책읽기의 중요성을 알아가던 차에 다시 책을 집어던지고 경쟁력을 판가름하는 함정식 문제풀이의 기술적 단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런 수준의 왜곡된 학력으로 유학을 가면 독창적 인재를 길러내는 서구의 교육에 적응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쇠고기 파동은 하나의 상징적 분노에 지나지 않는다. 절박하게 생존을 택했던 사람들이 이제서야 올바른 생존의 길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 촉매가 광우병 쇠고기와 정부의 대응이었다. 지난 십년이 잃어버린 십년이 아니라 사실은 국민이 ‘세계시민’으로 깨어가는 과정이었음을 집권층만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공공부문의 민영화까지 밀어 붙이게 되면 이제까지 겪어 본 민심의 수준으로 보아 정권 퇴진을 향한 시민들의 급진적인 대행진이 정당화될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정부 쪽 어느 인사의 말처럼 ‘총체적인 국정운영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면서 지켜보겠다. 안타까운 일은 정권 인수 백일이 못되어 광범한 사회계층의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동아시아에서 절호의 기회도 있고 역사적 사명도 막중하게 남아 있다. 나는 진심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바라고 그것이 한반도 전체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기초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그는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이것은 우리 전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지난 며칠 동안의 서울 밤 거리에서 물대포와 군홧발로 어린 소년 소녀들을 짓누른 댓가로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권이 사사로운 이권이 아니라면, 대통령과 새 정부는 자기와 다른 생각과 대화하고 그들의 능력을 창조적으로 자기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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