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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行動)과 실천(實踐)

지성유인식 2006. 1. 9. 23:34
 

다산의 사상을 추적해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행동이 없고 실천이 없으면 어떤 논리나 철학도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행하고 실천해야만 어떤 개념이 세워지고 성립되기 때문에 그의 학문을 통칭해서 ‘실학(實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학(儒學)이 이루고자하는 큰 목표 중의 하나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덕목(德目)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의 논리로 경전(經傳)을 해석했던 송유(宋儒), 즉 주자학파(朱子學派)들은 ‘인의예지’ 모두가 ‘재심지리(在心之理)’, 즉 마음속에 있는 이(理)라고 여겨 이론과 관념(觀念)의 세계에 안주하도록 정리하였습니다.

다산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인의예지의 이름은 행사(行事)한 뒤에야 이루어진다.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 뒤에야 인(仁)이라고 말하지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는 인의 이름은 세워지지 못한다. 나를 착하게(義字=善+我)한 뒤라야 의(義)라고 말하지 나를 착하게 하기 전에는 의의 이름이 세워지지 못한다”(仁義禮智之名 成於行事之後 故愛人而後謂之仁 愛人之先 仁之名未立也 善我而後謂之義 善我之先 義之名未立也 …『孟子要義』)라고 자세하게 설명하여 이치가 아니라 행동으로 옮긴 뒤에야 그 개념이 세워진다는 다산철학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마치 복숭아씨나 살구씨가 복숭아와 살구의 가운데 박혀있듯이 인의예지가 사람의 마음 가운데 숨어있다고 한다면 공자(孔子)가 안자(顔子)에게 일러준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자기를 이겨내서 예를 회복함이 인을 함이다)’의 ‘위인(爲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느냐라는 반문(反問)에 명확한 뜻이 담겨 있다고 여겨집니다.

인(仁)이란 위인(爲仁)으로 성립되며, 여기서의 ‘위(爲)’란 ‘작(作)’과 같고 ‘힘을 써서 일을 행함(用力行事)’의 뜻이고 ‘손을 대서 이루기를 도모함(著手圖功)’이니, ‘마음속의 이치’라고 한다면 어떻게 손을 대서 힘을 쓰겠느냐고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마음속에만 두고 있는 사람들,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들, 다산으로 돌아가 행동하고 실천해야만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