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삶의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지금까지 내내 믿고 의지하던 앎이나 신념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인간관계 등이 갑자기 제자리를 잃고 비틀대는 순간이 있다. 그때 삶은 어지러움과 혼란이란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곤 한다. 코린토스의 왕자인 줄만 알고 행복하게 지내던 오이디푸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에게 내려진 무서운 저주를 알게 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삶의 기반이 뒤흔들리는 경험이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지식이든 지위이든 권력이든 재력이든 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도구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뭔가를 의지하고 싶어 교회나 절을 찾아가기도 하고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기도 한다. 내면이 강건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혼란을 해결하겠노라고 선언하고는 말년의 오이디푸스처럼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다. 현실에서의 삶이 여의치 않을 때,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그들은 신전을 찾아가 신탁을 받았다. 신탁은 예언의 말이다. 물론 신은 인간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의 신탁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경구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델포이(Delphoe)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적힌 말이라고 한다. 여러 고민거리를 안고 신전을 찾은 모든 사람에게 내려진 아폴론의 조언이다. 그러고 보니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 역시 인간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에게 인간이 누구냐고 묻는 셈이다. 스핑크스는 이 수수께끼를 뮤즈(Muse)에게 배워서 알았다고 하기도 하고 자신의 부모로부터 배웠다고 하기도 한다.
스핑크스의 부모는 아폴론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진 델포이의 왕뱀 피톤(Python)과 같은 종족이다. 피톤은 아폴론 신전이 세워진 곳인 델포이에 살고 있었고 아폴론이 신전을 세운 자리는 이 피톤의 동굴이었다고 한다. 아폴론의 여사제를 피티아라고 부르는 것도 최초의 사제가 피톤의 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핑크스와 아폴론이 몇 다리를 거친 연관관계 속에 있는 셈이다. 아폴론이 지성과 자신감이 넘치는 남신의 말투로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면 스핑크스는 괴팍하고 음울한 분위기의 여러 겹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둘 모두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는 누구인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얼핏 보면 스핑크스가 작은 조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핵심은 운명의 잔혹함과 그 운명을 견뎌 내야 하는 인간의 고통과 비극적 상황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버려졌고 절름발이인데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운명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를 알고 피하려 고향을 떠나는 선택을 했지만 그 선택이 바로 그를 불운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만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 나라의 왕이 되었으며 선왕의 아내인 어머니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는다. 그는 늘 뭔가를 알아내고 해결했다고 자신하지만 해결은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앞에 놓인 덫에 발이 감기는 꼴이 된다. 고향을 떠난 것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것도, 테바이의 왕으로서 나라의 불행을 해결하려 한 것도 모두 결국 자신을 하나의 지점, 예언의 실현이라는 운명으로 끌고 간 셈이다.
그는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가 모든 것을 알고 나서 한 일은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눈을 찌르면서 아폴론을 저주한다. “나에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불행을 일으킨 건 아폴론이다.” 자신의 눈을 찌른 이유는 아폴론이 눈의 지혜와 관계된 신이었고 모든 불행이 아폴론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폴론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지만 그가 가져다주는 앎이 오이디푸스를 불행에 빠트리고 만 것이다.
이때 죽은 듯 보였던 스핑크스가 다시 살아난다. 인간에게 위기의 순간에 ‘너 자신을 알라’고 명령했던 자신만만한 신의 목소리가 갑자기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이 진짜 자기 모습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의존하는 기관은 눈이다. ‘봐, 이게 맞잖아’, ‘너는 눈에 뵈는 게 없니?’, ‘알아보자’ 등의 우리말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는 눈으로 봐서 안다. 눈에 보이게 확연히 드러나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눈이 우리를 배신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두 눈으로 본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만약 우리가 눈에 속고 있는 것이라면 어찌할 셈인가?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가 봉착한 문제다. 그가 자신의 눈을 찌른 것도, 아폴론을 저주한 것도 바로 이러한 깨달음 때문이다.
아폴론은 지중해 지방에서 태양의 신이자 지혜의 신이다. 그리스인들은 우리의 눈과 태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으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 역시 아폴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이 학문과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무엇보다도 눈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빛은 사물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 주고 밝은 빛 덕분에 우리는 이것이 저것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가까운 것과 먼 것, 튀어나온 것과 들어간 것, 구불구불한 것과 곧게 뻗은 것 등 정체성 확인을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잣대는 우리의 시각에 의존한다. 우리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분별하는 데 애를 먹을 것이다.
아폴론의 지혜는 밝은 대낮에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비춘다. 작열하는 태양의 조명을 받으면 모든 사물이 명료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는 것처럼 아폴론의 지혜의 빛에 비친 세계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보인다. 나는 나, 너는 너. 아버지는 아버지, 어머니는 어머니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 내가 너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어머니가 아내가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 질서 정연하므로 혼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직면한 삶의 모습은 어떤가? 자신이 죽인 자는 적이 아니라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아내가 된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누구란 말인가? 자기가 낳았으니 자기 자식이겠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자식이므로 동생이 되는 셈이다. 명명백백했던 정체성이 일거에 무너지고 만다.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 역시 삶과 우주의 이러한 아이러니한 혼란상의 한 자락을 보여준다. 그것은 두 발로도, 네 발로도, 세 발로도 걷는다. 또한 그녀는 사자이자 독수리, 뱀이자 인간이다. 아폴론의 지혜는 이러한 우주를 괴물로 치부해 버린다. 아폴론의 밝은 이성이 조명할 수 없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아폴론의 논리는 동일률의 논리다. 동일률의 논리에서 사자는 사자, 독수리는 독수리이지 사자이면서 독수리일 수는 없다. 사자를 독수리라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이다. 하지만 스핑크스는 아폴론을 비웃는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직면해서 ‘이것만이 옳다’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 생각에 맞지 않는 모습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내 생각을 배려하지 않고 움직일 때가 많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은 생각일 뿐이다. 상황이 내 생각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움직일 때 나는 어리둥절하다 화가 난다. 그리고 고통받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법칙과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 속에 빠진다. 그때 우리는 생각의 한계를 절감하기보다는 상황과 세상에 대해 화를 내곤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물론 우리가 사는 세계의 환경과 제도는 거의 모두 우리가 만들어 놓은 질서 정연함 속에서 움직인다. 마치 인공적 질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과학과 기술 덕택에 우리는 세계를 움직이는 모든 원리를 알아 버린 듯도 하다. 이론은 일어날 법한 모든 것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줄 것 같고, 논리 정연한 이론에 통달하기만 하면 우리는 장차 일어날 모든 위험을 예상하고 세계를 맘대로 다룰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세상은 생각으로 통제 가능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한 순간, 세상은 예상을 뒤엎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우리의 앎이 일면적인 까닭이다. 삶의 전체성은 늘 우리의 지식과 예상의 한계를 넘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게 자연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는 스핑크스가 나타나면 세상에 역병이 돈다고 되어 있다. 소포클레스 시대에 자연의 불가해함과 마주치는 일은 일종의 재난으로 여겨진 모양이다. 스핑크스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 괴물이 재난을 가져온다. 괴물은 모두 설명 불가능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을 대변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괴물은 모두 남성 영웅을 유혹한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세이렌(Seiren)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메두사(Medusa)처럼 영웅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로 여겨진다. 세이렌은 새의 몸을 지닌 여자였고 메두사는 뱀 모양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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