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의 전쟁에서 우리가 미국 편이 돼서 일본에게 끝까지 싸웠다면 당연히 전쟁이 끝날 때 독립을 쟁취했겠죠. 그런데 주변국들이 우리가 일본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어요. 우리가 일본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세계 지도자 중에 장제스(장개석)밖에 없었어요.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을 때 ‘4억 중국인보다 조선의 한 청년이 더 위대하다’라고 얘기했고, 그 이후 상해 임시정부를 보호해 주기도 했습니다. 카이로 회담에서 ‘전쟁이 끝나면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장제스입니다.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가 참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장제스와 마오쩌둥(모택동)이 서로 싸우고 있었어요. 그래서 스탈린이 ‘왜 장제스가 중국을 대표하느냐? 장제스는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 카이로 회담에 불참해버렸습니다. 스탈린이 없는 상태에서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이렇게 셋이 만났는데, 처칠과 루스벨트는 조선의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장제스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줄 알아서 카이로 회담에서는 조선의 독립 얘기가 거론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장제스의 참석을 반대하니까 다음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는 결국 장제스가 빠지게 됩니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루스벨트와 스탈린, 처칠, 이렇게 셋이 만났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 얘기가 일체 없었습니다.
그 결과 만주는 소련이 관할하고, 일본과 대만은 미국이 관할을 했어요. 한반도는 누가 관할할 거냐를 두고 소련과 미국이 서로 자기가 하겠다며 맞섰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38선을 그어서 남쪽은 미국이 관할하고, 북쪽은 소련이 관할하는 것으로 된 겁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미국과 일본이 합의해서 미국은 필리핀을 장악하고, 일본은 조선 반도를 갖기로 한 게 카스라-테프트 밀약을 맺은 1905년입니다. 그리고 딱 40년 지난 1945년에는 38선을 딱 그어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관할하기로 합의한 겁니다.
지금 중국은 절대로 북한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과 패권 경쟁을 하고 있는데, 만약 남한과 북한이 남한의 주도 하에 통일을 한다면 미군이 주둔한 통일한국과 1200km나 국경을 맞대어야 하잖아요. 중국은 이걸 하늘이 두 쪽 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오히려 남한까지 관할해서 대한해협에서 미국과의 전선을 구축하려고 할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새로운 구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역사를 공부해보면 항상 어리바리하다가 식민지배를 당했고, 어리바리하다가 분할이 돼서 강대국에 놀아났듯이, 지금 또 어리바리하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요. 중국 입장에서는 한반도 전체를 중국의 관할 하에 두는 게 제일 좋을 겁니다. 그게 안 되면 북한이라도 중국의 관할 하에 두려고 할 거예요. 그것도 안 되면 중국의 마지노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부터 200km는 절대 양보하지 못한다는 입장입니다. 지금 이대로 가면 강대국이 짜 놓은 판에 우리가 끌려 들어가게 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미국이 중국과 진짜 경쟁을 하겠다면 북한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국과의 경쟁에서 훨씬 유리해요. 북한이 중국으로 넘어간다면 중국이 곧장 나진항이나 청진항에 동해 함대를 둘 수 있어요.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와 연합전선을 펴면 미국은 일본 방위도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이 딱 막고 있으니까 중국이 동해로 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미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북한을 핵 문제라는 관점에서만 보지 마라. 너희가 정말로 미국의 국익이 우선이라면 대중국 전선에서 북한을 활용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정말 중국을 견제하겠다면 북한을 오히려 너희 편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북한이 아직 안보를 불안해하니까 핵 폐기를 전제로 하되 우선은 핵동결부터 시작해서 북한의 안보 불안을 해소해주고 미국 편으로 끌어와서 결과적으로 통일된 코리아가 미국에 협력하도록 하면 미국에 훨씬 낫지 않겠냐? 우리는 평화와 통일의 기회가 오고, 너희는 대중국 전선에서 유리해진다.’
지금 미국이 하는 정책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n first)’가 아니라 ‘차이나 퍼스트(China first)’라는 겁니다. 북한은 미국 말도 안 듣고 중국 말도 안 들어요. 그런데 미국이 이런 식으로 북한을 계속 압박하면 북한은 자기들도 살기 위해서 중국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아무리 자주를 주장하고 버티다가도 막판에 죽는 순간이 되면 살길을 찾게 마련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같은 제재 국면에서도 압록강, 두만강 뒤로 중국으로 통하는 구멍은 다 뚫려 있는 겁니다. 중국도 국제사회의 제제에 협력해야 하지만, 그래도 북한과 원수가 되면 안 되니까요. 북한이 넘어지지 않도록, 또 만약에 넘어진다면 중국 쪽으로 넘어지도록 하고 있는 거예요.
중국도 그런 전략을 쓰고 있는데, 우리도 그런 궁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북한과 서로 협력해 나가지만, 만약 북한이 자기 스스로 못 견뎌서 넘어진다고 하면 우리 쪽으로 넘어지도록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려면 북한 안에 친중 정부가 아닌 친남 정부가 들어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 안에 친남 정부가 들어설 아무런 근거가 없어요. 그러려면 이런 제제 국면 속에서도 인도적 지원을 하거나 서로 협력할 방도를 찾아야 해요. UN 제재에 해당이 안 되는 인도적인 지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금강산 관광 같은 건 지금 당장 추진해도 괜찮아요. 요즘 중국에서는 북한에 들어가는 관광객이 1년에 30만 명이나 됩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 남한은 멍청한 거예요. 미국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금강산 관광이나 인도적 지원은 UN 제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중국에서는 관광객도 보내고 인도적 지원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안 하고 있어요. JTS가 북한에 식량을 보내려고 해도 한국에서는 못 보내고 중국에 가서 보내야 해요.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어떻게 되겠어요? 지금처럼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미사일을 쏘는 게 반복되면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점점 높아집니다. 전쟁이 안 일어나더라도 지금처럼 계속 압박하면 장기적으로 북한은 중국 쪽으로 넘어질 거예요. 설령 안 넘어진다 해도 남한과 북한은 서로 원수가 될 겁니다. 그러면 중국, 러시아, 북한이 동맹 관계로 갈 거예요.
지금 미국은 우리한테 한미일 삼각동맹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겁니다. 지소미아(GSOMIA,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는 그런 미국의 전략에서 나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자기들도 살아야 하니까 중국과 동맹을 맺을 테고, 그러면 미국과 중국의 새로운 패권 구도 아래에서 또다시 남한과 북한이 그 하부 구조에 편재되어 경쟁의 최전선에서 만나 부딪히게 됩니다. 통일은 아예 생각도 못할뿐더러 평화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이런 조건이기 때문에 남북한이 협력해서 자주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한이 힘으로 북한을 밀어붙이면 중국은 당연히 조중 동맹에 의해서 군대를 파견하겠죠. 반대로 북한이 남한을 밀고 내려오면 미국이 군대를 파견할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힘으로는 통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6.25 전쟁 때 경험해 봤잖아요. 북한이 힘으로 남쪽을 밀어붙이니까 미국이 참여해서 막았고, 반대로 미국이 북쪽으로 밀어붙이니까 중국이 참전했어요. 그래서 전선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다가 지금의 휴전선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힘으로는 해결이 안 돼요. 자꾸 ‘북한을 폭격해버리면 해결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국이 없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어쩌면 중국은 아마 미국이 북한의 핵만 제한적으로 폭격해주길 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현재의 북한 지도부가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겠죠. 그러면 중국이 북한에 친중 정부를 세울 수 있겠죠.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셈입니다. 중국도 북한이 말을 안 들으니까 골치 아프잖아요. 말 안 듣는 북한을 미국이 알아서 제거시켜주니까 얼마나 좋겠어요?
이처럼 북한이 버텨도 전쟁의 위험이 있고, 질질 끌면 신냉전 구도가 형성되고, 넘어지면 치중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요. 우리가 대처하기엔 이미 시기가 좀 늦었어요. 10년 전에 남북 관계를 풀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남북이 서로 자발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으면 중국이 간섭할 명분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지금 이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취직이 어떻고 결혼이 어떻고 연애가 어떻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문제가 훨씬 중요해요. 전쟁이라는 건 우리들의 존립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안 일어나도 강대국이 짜 놓은 판에 이렇게 묶여 버리면 우리의 국가 진로가 막혀 버리게 됩니다.
물론 남한과 북한이 이 어려운 국면을 딛고 자주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길은 아직 있습니다. 완전한 하나의 통일국가는 아니더라도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미중의 경쟁 속에서 캐스팅보드를 거머쥘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반도에만 평화가 오는 게 아니라 미중 사이에서도 최소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평화가 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한반도의 평화는 곧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고, 나아가 세계 평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북이 협력하면 우리 민족의 진로에 굉장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에게 최대의 위협이고, 미국이 우리에게 최대의 동맹이라는 이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 현실을 무시하지 않되 현실에 안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면 미래가 없고, 현실을 무시하고 나가면 평화도 지키기가 어려워요. 두 발은 현실에 딛고 이 상황을 수용하되 미래의 희망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미국과의 관계에서 종속적 한미 동맹 관계를 조금 조정해야 해요. 아무리 동맹 관계라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우리의 이익만큼은 미국이 양해를 좀 해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미국에 맞서거나 반대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한반도는 우리 민족의 희망과 진로가 담겨 있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두 가지 원칙만큼은 고수해야 합니다. 첫째,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북이 통일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늘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정책을 추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국이 중국과 경쟁을 하더라도 한반도에서만큼은 우리의 이익을 우선시해서 보장해다오. 그러면 나머지 문제는 너희가 하자는 것을 협조하겠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무조건 해야 하는 게 동맹이 아니에요. 그러면 속국이지요. 주한미군 주둔비를 좀 더 내는 대신에 이건 꼭 보장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기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안 주는 게 최고가 아니라, 조금 주더라도 그보다 더 큰 이익을 확실하게 보장을 받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 정부는 역량이 좀 딸리는 것 같아요. 역량이 딸리는 가장 핵심 이유는 역사의식 부족이에요. 판을 못 읽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확고부동한 관점을 딱 갖고 있어야 협상을 할 때 강할 땐 강하게 하고, 유할 땐 유하게 할 수 있어요.
지금은 우리가 발해 멸망 이후 천 년 만에 약소국가라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자주국가로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대륙을 잃고 나서 지난 천 년 동안 지금만큼 역량이 커진 적이 없어요. 이 기회를 못 살리고 또다시 찌그러진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래서 역사 공부를 좀 하셔야 된다는 거예요.”
- 법륜스님 청춘 역사 톡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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