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아! 대한민국의 미래는!(2)

지성유인식 2016. 4. 15. 03:10

2016.4.13!

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여소야대에 지역색 무너짐이 시작되었고

젊은이의 참여가 놓아지고 있는 것이다.

 

정당별 의석수 300석 (지역구253/비례대표47)

더불어민주당 123(110/13), 새누리당 122(105/17),

국민의당 38(25/13), 정의당 6(2/4), 무소속 11(11/-)

임기4년 (2016.5.30 ~ 2020.5.29)

투표율 58.0% (투표자 24,431,533명)

 

광역시도 중 경북(전체 새누리당과 광주(전체 국민의당),

제주도(전체 더불어)를 제외하고 여야의원 1명 이상이 당선되었다.(전체 1석인 세종시 제외)

 

대구 12명중 새누리8, 더불어1, 무소속3, 54.8%

부산 18명중 새누리12, 더불어5, 무소속1, 55.4%

경북 13명 모두 새누리당, 56.7%

경남 16명중 새누리12, 더불어3, 정의1, 57.0%

광주 8명 모두 국민의당, 61.6%

전북 10명중 새누리1, 더불어2, 국민7, 62.9%

전남 10명중 새누리1, 더불어1, 국민8, 63.7%

서울 49명중 새누리12, 더불어35, 국민2, 59.8

인천 13명중 새누리4, 더불어7, 무소속2, 55.6

대전 7명중 새누리3, 더불어4, 58.6

울산 6명중 새누리3, 무소속3, 59.2

세종 1명 무소속, 63.5

경기 60명중 새누리19, 더불어40, 정의당1, 57.5

강원 8명중 새누리6, 1, 정의당1, 57.7

충북 8명중 새누리5, 더불어3, 57.3

충남 11명중 새누리6, 더불어5, 55.5

제주 3명중 더불어3, 57.5

비례대표 47명중 새누리17, 더불어13, 국민13, 정의4

“끊어진 기회평등의 사다리를 잇겠습니다.”

김해영(부산연제) 더불어민주당 당선자가 선거운동 기간 내내 금수저, 흙수저로 표현되는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하다 체념한 청년들에게 했던 약속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선 그의 호소에 부산 연제구 주민들이 화답했다.

부산 연제구는 1996년 15대 총선 때 선거구가 분리된 뒤 20년 내리 새누리당 후보가 뽑힌 보수 여당의 텃밭이다. 이곳에서 김해영(39) 당선자는 여성가족부 장관 등을 지낸 2선 의원 김희정 새누리당 후보를 치열한 접전 끝에 눌렀다.

김 당선자는 애초 인지도와 조직력에서 상대 후보에 견줘 밀린다고 평가받았다. 예상과 달리 김 당선자가 여당 공천을 4차례나 받은 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자, 역경을 딛고 일어선 ‘흙수저 신화’란 평가가 나온다. 그는 선거운동을 할 때 자신이 흙수저 출신이며 기회 불평등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김 당선자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릴 적부터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고모집에서 얹혀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러 밖에 나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고모도 장사 때문에 2~3일에 한번 그를 돌봤다. 점심은 굶기 일쑤였다. 김 당선자는 “가난은 큰 콤플렉스였다. 어릴 때는 왜 나만 이런지 화가 났다”고 말했다.

김 당선자는 1992년 경남 거제의 한 고교에 진학했지만, 얼마 다니지 않고 그만뒀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듬해 고모집 근처의 한 고교에 1학년으로 복학했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잦은 가출로 거리를 떠돌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시험에선 100점 만점에 평균 12점을 받아 같은 반 43명 가운데 42등을 했다.

김 당선자는 고교 3학년 때 대학 진학 대신 직업반을 선택해 미용기술을 배웠으나 “열정이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에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1995년 수능 50일 전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해 부산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김 당선자는 2002년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3년 김 당선자의 아버지가 대장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 그는 사법시험 공부를 중단하고, 아버지 병간호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간병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의학전문서적을 보며 대장암 치료법 찾기에 매달렸다. 2007년 12월 항암치료 약재를 구하러 호남 쪽으로 가던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넋을 놓았다. 이후 그는 이를 악물고 고시 공부에 매달렸고, 2009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김 당선자가 2009년 사법연수원 때 노동법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사회 부조리를 고민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2011년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가 있는 법무법인 부산에서 사법연수 실무수습을 했다. 그는 문 전 대표한테서 변호사가 어떻게 사회를 위한 공익활동을 하는지를 보고 배웠다. 실무수습이 끝난 뒤 그는 2012년 대선 때 후보로 나선 문 전 대표의 부산 홍보위원회 활동을 했다. 그는 2014년 연제구 당 지역위원장을 맡으며 현실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우리 사회는 금수저와 흙수저를 구분합니다. 어려운 사람에겐 기회조차 없다는 말이지요. 기회는 운 좋은 사람한테만 주는 로또가 아닙니다. 양극화 현실을 바꾸려고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겠습니다.” 청년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입법활동을 중점적으로 펼치겠다는 그의 목소리는 힘찼다.

부산/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