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나는 새 2011. 1. 1. 03:19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실종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실종으로 인해 가족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엄마의 존재를 새삼 깨닫는다. 실종은 엄마의 기억을 분출시키는 계기였다. 분명 불행한 일이나 그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대부분 우리들은 그런 자각의 기회를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얻는다. 그러나 가버린 분들은 말이 없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남겨진 자식들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기억의 흔적이 크게 남지 않는다.

부모님에 관한 ‘병상일지’, ‘장례 기록’, ‘언행기’

과거에는 지금에 비해 부모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 전통이기는 했으나 그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 심로숭(沈魯崇, 1762~1837)이란 정조, 순조 때의 문사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가족사를 꼼꼼하게 기록하기를 즐겼다. 유독 그는 부모님의 생전 모습과 임종시의 일거수일투족을 정성을 다해 기록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따로 적어서 제각기 단행본 한 권쯤 될 분량이다. 방법은 세 가지로 임종을 앞두고 병석에 누운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한 ‘병상일지’[寢疾記]와 장례의 시시콜콜한 과정을 기록한 ‘장례의 기록[喪葬記]’, 그리고 고인의 말씀과 행동을 기록한 ‘언행기(言行記)’였다. 아버지의 언행기는 양이 너무 많아 몇 권에 이른다.

마지막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서 생전의 기억까지 더듬어가는 과정을 그는 눈물과 회한 속에 담아냈다. 인상깊은 것은 어머니의 병상일지다. 칠십을 넘겨 사신 어머니는 “천고의 여자들에게서 일찍이 없던 분이라”고 기억할 만큼 강한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50세 이후 중풍기와 치통에 위장병, 횟배로 고생한 뒤로 감기와 구역질, 학질 따위를 앓은 내력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1812년 4월 2일이었는데 11일 이후부터 8일 동안은 하루하루의 병상일지를 써내려갔다. 무슨 증세가 나타났고, 어떤 의사에게 어떤 약을 처방받았고, 자신과 딸은 어떻게 보살폈는지 일일이 기록했다.

과정을 되짚어가면 하나하나가 다 후회와 통탄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의원 유경흥의 말에 따르면 땀을 내서는 안 되는데 딸의 말을 듣고 땀을 낸 16일의 일을 후회했고, 고통을 겪는 어머니가 밤새 눈물로 세수한 모습을 아침마다 보면서도 대책이 없는 괴로움을 토로했다. 당황하여 허둥대는 자신에게 잠깐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네 하는 꼴을 보니, 내가 어서 죽어 보고 싶지 않다. 내 명을 재촉하는 게 너로구나. 이래서야 무슨 일을 하겠느냐? 내 스스로 끊는 게 낫겠다”는 모진 말씀도 들었다. 17일 밤에는 지방의 현감 자리가 비어 자신에게 주려고 했다가 더 좋은 자리가 나면 임명하겠다며 취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할 기회마저 놓쳤다고 애달파했다. 그리고 이틀 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51세 되던 1812년의 일이었다.

후세의 자식된 사람에게 타산지석이 되라고

일기 속에 병상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가끔 있어도 이렇게 독립된 저술로 부모님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소상하게 기록한 것은 드물다. 그는 이렇게 병상일지를 쓴 동기를,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폭로하여 천하 후세의 자식된 사람에게 자기 같은 못난 자를 보고 타산지석을 삼으라는 뜻이라고 후기에서 설명했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때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어머니마저도 더 오래 사시게 하고 더 편안하게 보내지 못한 회한을 표명한 셈이다.

병상일지에 그치지 않고 그는 장례를 치르는 과정의 크고 작은 일을 심하다 싶을 만큼 자초지종을 기록했고, 따로 생전의 어머니 말씀과 행동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어 하나하나 점검했다.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도 숨기지 않았다.

젊은 시절 몹시도 여자를 밝혀 방탕하게 살던 아들을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말없이 지켜보던 일이며, 정조 사망 후 경상도 바닷가로 귀양갈 때 말없이 행장을 차려주던 일이며, 귀양지에 도착하여 옷상자를 열자 어머니께서 늘 입던 옷 한 벌이 들어있고, 종이봉투 위에 “내가 보고 싶으면 이것을 보거라”라고 쓴 일을 기억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그는 또 대성통곡했다. 귀양간 지 6개월쯤 될 때 언문편지를 보내 혜경궁 홍씨가 정조의 사후에 겪는 참혹한 고통을 생각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다독거리시던 일도 기억에 떠올렸다. 중년 이후 짧은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신 일과 소설을 읽거나 정치에 관심을 두어 남편에게 따지던 일도 있었다.

살아계실 때야 아침에 못하면 저녁에라도 하면 되지만 한번 가시고 나면 더 이상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부모님의 기억을 붙잡아두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 그의 저작이다. 그는 자신의 기록이 후세 사람에게 부모를 생각하는 자극제가 되기를 바랐다. 그가 남긴 세 가지 저술을 보며 한없는 부끄러움이 드는 것은 나만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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