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여년 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역시 일제 식민사관이 아니라 낙랑군 설치 당시의 시각으로 그 위치를 찾아야 한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뜻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나바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중국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럼 지금의 창려현이 옛날에는 수성현이었는지를 알아보자. 고대 지명은 왕조 교체에 따라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러 사서(史書)를 추적해야 한다. <수서(隋書)> ‘지리지’는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이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18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창려현이 과거 수성현의 일부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못 본체하고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1913년 세키노(關野貞) 같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 곧 옛 조선현으로 만들어졌지만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론이 일었다. 고대 수도는 관방(關防), 즉 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한데 대동강변 토성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반론이었다. <사기> ‘조선 열전’은 고조선의 우거왕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적고 있지만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는 또 “우거왕이 굳세게 성을 지켜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적고 있는데, 대동강변 토성은 반나절도 지키기도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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