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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스님 적멸하다

나는 새 2020. 5. 15. 19:55

 

 

 

 

 

적멸스님, 적멸하다!

1795년 (정조 19) 호남 암행어사 정만석

 

어사 정만석이 지리산 실상사에서 겪은 이야기. 어사 정만석은 청죽과 닥나무의 무리한 공납 강요로 인한 폐단을 목격하고, 정조에게 그 해결책을 제안한다.

 

지리산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실상사. 스님들은 나무를 채취하는 일로 부산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 닥나무의 작은 줄기를 꺾어내는 것이었다 닥나무 가지를 한 묶음으로 엮으면서 적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묵언정진 중인 데도 종이 만드는 일에 빠질 수가 없었다. 며칠 안에 실상사에서 종이를 200속이나 만들어 관아에 바쳐야 했던 것이었다. 종이를 만드는 일, 즉 닥나무를 기르고 베고 껍질을 벗기고 계곡 물에 깨끗이 씻고 잿물에 넣어 삶은 뒤에 반석이나 절구에 넣고 으깨어 닥풀을 만들고, 한지를을 발로 떠내어 말리고 마지막으로 잡티를 제거하고 다듬이질하는 과정은 여간 번잡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도 어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토굴이나 파고 들어 앉아볼까. 적멸은 손은 손대로 놀리면서도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지난 해 깊은 산 속으로 훌훌 떠나버린 방장스님이 새삼 부러웠다. 여섯 살에 동자승으로 들어와 절밥을 먹은 지 10년, 올 봄 비구계를 받았지만, 적멸은 날이 갈수록 중노릇이 힘들게만 느껴졌다.

 

불도를 닦고 염불 외는 일이 중노릇이 아니었다. 산성을 쌓는다, 관아를 짓고 수리한다 해서 동원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양반님네 묘소에 석물 나르기, 송화가루와 산나물 채취, 종이와 두부을 만들어 바치는 일도 다 절 집에서 중들이 해야 하는 신역이었다.

 

무성하던 닥나무 숲은 선비님네들의 서책이 되기 위한 소신공양으로 이제는 숲이랄 것도 없이 몇 그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적멸의 귀에는 숲에 깃든 뭇생령들이 갈 곳 몰라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차피 절에 살아도 계를 못 지키기는 마찬가지! 또다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다.

적멸이 절 안마당에서 삶은 닥나무 껍질을 절구에 넣고 찧고 있는데, 저만치 말을 탄 양반님네가 시종을 거느리고 피안교를 건너오고 있었다.

 

절에서 키우는 개 미르기가 몇 번인가 컹컹 짖더니 꼬리를 감추고 뒷산으로 물러났다. 작년 여름 제 어미가 계곡에 물놀이 온 한량님네들의 보신탕이 된 후로 미르기는 양반님네들 냄새만 맡아도 산으로 도망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긴 미르기만이 아니었다.

 

꽃놀이다 물놀이다 양반님네들이 행차하실 때마다 절간에서는 없는 살림을 축내가며 접대를 해야 했다.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 회를 치고 매운탕을 끓이고 전도 부쳐야 했다. 절간에서 기르는 개까지 잡아서 바치라는 판이니 무슨 말을 더 할까. 호환, 마마보다도 더 무섭고 징그러운 것이 양반님네들이었다. 내일 물놀이를 온다더니 먼저 도착한 일행인가? 일주문을 들어서는 행색을 보니 놀이객은 아닌 듯 싶었다.

 

“주지스님 계신가?”

정만석은 마당에서 절구를 찧고 있는 한 중에게 물었다. 중은 대답 없이 합장만을 했다.

“출타중이십니다.”

닥풀을 만들던 다른 중이 대신 대답했다.

 

정만석은 요사채에 행장을 풀고 다시 안마당으로 나왔다. 반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왔지만 종이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난 경술년에 종이 공납에 얽힌 폐단을 개혁한 후에 실정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중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꽉 다물고 일에만 열중하는 탓에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안에 들어가셔서 차 한잔 드시지요.”

 

아까 닥풀을 만들고 있던 중이 정만석을 발견하고 선방으로 이끌었다. 주지스님의 상좌라고 했다.

 

“종이 만드는 일이 아주 거창합니다.”

 

정만석이 치하를 하자 상좌승은 알듯 말듯 고개만 끄덕였다.

 

“종이 공사를 이렇게 크게 벌이시니 절 살림이 피겠습니다 그려.”

 

정만석이 짐짓 너스레를 떨자 상좌승이 이번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경술년에 종이로 인한 폐단을 개혁한 후에 조금 나아지는 듯 했지만 힘들기는 여전합니다. 절목 중에 관영에서 매입하는 분량을 50속으로 정해 놓고 쓸 곳이 있는 경우 본래의 가격을 지불하고 추가로 매입하게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간색지(看色紙: 종이를 납품받을 때 견본 명목으로 추가로 징수하는 것)가 문제입니다.”

“원래 1속마다 2장씩 받던 간색지를 나라에서 금지시켜 혁파했던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지켜만 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올해에도 150속 매입할 때 간색지가 30속이나 되었습니다. 혁파되기는커녕 도리어 두 배로 걷은 셈이지요.”

“허, 참!”

“관아에 바치는 종이도 벅찬데 서원, 향교를 비롯하여 힘깨나 쓴다는 양반님네들까지 가세하여 종이상납을 강요하지요. 종이 값도 시가의 삼분의 일 이하로 후려치고, 심한 경우에는 쌀 몇 되만 주고 빼앗다시피 가져가는 일도 있지요. ”

 

정만석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상좌승이 갑자기 짓궂은 음성으로 물었다.

“선비님은 ‘헐레벌떡 종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헐레벌떡 종이라?”

“종이 가운데 공을 덜 들여 만들어서 질이 낮은 종이를 초초지(草草紙)라고 하는데, 나라에서 하도 종이 만드는 일을 닦달하니, 초초(草草)란 글자를 허둥지둥, 헐레벌떡이라고 풀어서 ‘헐레벌떡종이’ 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허허! 거 참!“

 

정만석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종이를 만들던 관청인 조지서(造紙署) 황폐해져서 이 일을 남쪽 지방의 절들이 떠맡아왔다.

 

그런데 학문을 숭상하는 정조임금이 등극하고 나서부터는 출판이 활발해서 종이가 많이 필요해졌다. 심지어 정조는 게으른 선비들이 누워서 책을 보려고 작은 당판본(唐板本)을 수입해다가 본다고 자주 책망하고, 커다란 책을 많이 만들게 하는 바람에 종이가 더더욱 모자라게 된 실정이었다.

 

“그저 웃자고 드린 말씀입니다.”

 

정만석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 챈 상좌승이 슬그머니 말꼬리를 내렸다.

저녁공양을 들고 요사채로 돌아온 정만석은 돌석을 불러들였다.

 

“어디, 중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으면 말해보아라.”

“종이 만드는 일이 보기에도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실상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닌가 봅니다. 관아의 횡포도 심하고요. 종이를 바칠 때 품질검사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 아까운 종이에 먹물을 뿌려 퇴짜를 놓고 다시 만들어오라고 한답니다요. 이런저런 힘든 일이 절에 떠넘겨지니 중들이 견디다 못해 하나둘 도망을 해서 급기야 아주 망해버리는 절도 있다는데요.”

 

다음날 아침 정만석이 길을 떠나려는데, 기생들과 악공들을 거느린 양반님네 놀이행차가 피안교를 들어섰다.

 

절 안의 모든 중들이 그 행차를 맞이하느라 부산을 떠는데, 미르기가 일찌감치 뒷산으로 도망을 친 것은 말 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적멸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상좌승이 주지스님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스님. 적멸스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주지스님의 하얀 눈썹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호방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허! 적멸이 그예 적멸을 하였구나! ”

 

<문화콘텐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