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1. 대마도 여행

나는 새 2019. 5. 20. 04:43

 

 

 

 

 

 

 

 

 

 

 

 

 

 

 

 

 

 

 

 

 

 

 

 

 

 

 

 

 

 

 

 

 

 

 

 

 

 

 

 

탑마루산악회를 따라 대마도를 여행했는데

느낌은 원시림으로 싸여 있는 조용한 섬이다.

 

19.5.18부터 2일간의 여행으로

과정이 장난이 아니였다.

또 다른 아니 여권을 챙기지 않고

버스의 트렁크에 베낭을 놓고 오는 마이너스의

나를 발견한 여행이였다.

 

02:42 제일산부인과 건너 탑승 연락을 받았는데

00:10경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 잠들기도 그래

준비해 볼링장을 가든 이브를 가든 하자는 생각에

나가 걸으며 가까운 이브로 가 오만원을 선 결재 하고

소주 한병을 마시는데 주모가

사장이 빈 속에 술을 마시고 있다 걱정하여

족발을 사 주었다.

 

02:30 가게 문을 닫고 사장이 목적지까지 때워다 주어

비오는 밤 편안히 출발 할 수 있었다.

 

전자랜드 네거리를 지나 총무가 준비물 여권을 말 하는데

준비하지 않아 회물터미널 건너에 버스를 정하고 택시를

대절 집에 왔다 갔다.- 나중에 일행 중 한명이 웃으면서

하여 장난인 줄 알았단다.

 

숙소인 View Hotel 호텔에서 가스랜지로 하는

삼겹살 바베큐 저녁에 술과 관련하여 가져간 소주를 마시되

기본 맥주를 팔아 주기로 했다는 가이드의 안내가 있어

버스 기사인 최사장이 아사이 맥주 10병을 내기로 했는데

저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정정인 회원이 맥주를 한잔 주며

웃으며 여권으로 인한 피해 배상을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말에 번쩍!

 

내가 맥주를 샀어야 했는데...

밀려오는 마음의 파도를 집행부와 같이 있는

최사장에게

내가 돈을 내면 안되겠냐 하니 안 된단다.

 

그런데 엔화가 없는데 카드, 한화를 받지 않는 호텔이라

결국 내가 낼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 되어

6,000엔을 지불하였다.

 

뒷풀이를 104호 회장 방에서 열댓이 하다 마지막으로

호텔 우측에 있는 고인돌형 평상에 회장,정ㅇㅇ, 양ㅇㅇ

최 ㅇㅇ이렇게 5명이 했다.

 

다 마치고 방에 들어 가 씻고 나니 번뜩 이렇게 왔는데

참새가 방아간을 그냥 가지 않듯이 시내 술집을 들려

보자는 생각에 걸어 나가 선술집에서

정종 1잔(500엔/잔)과 오뎅을 먹고 옆 골목의

가라오케 단란주점에서 정종 1잔(가격같음),

노래 2곡(나1, 사장1. 200엔/곡)을 부르고

택시(야간할증610엔) 귀소하였다.

 

오는 날에는 국제여객터미널 주차장에서 베낭을

놓고 나와 우리 나라 입국서류 작성을 마치고 나서야

놓고 온 것이 생각나 찾으러 갈려니 회장이 들고 있다.

 

 

가고 오는 바다에 파도가 높아 갈 때 30분, 올 때 1시간이

더 소요 되었다. 올 때 파도 방향이 출항 후 한 30분은 앞이고

그 후로는 뒤였는데 시간이 더 걸린 것은

조류 탓인 것 같다.

 

갈 때는 승객의 1/4 정도가 멀미를 했고,

올 때는 한 사람도 없었다.

0730 부산도착 0900 nina선出 1100하따카슈항着 1150버스5353出뮤다하마해수욕장1157着1212출2차대전對소련해군격전지경유1220화해장着점심1310出1330한국전망대조선역관위령비着1345出조선시대空島정책으로 대마도를비워일본인이실효점령후일복땅이되었다설명1455와타즈미신사(海山神형제중동생산신이해신의낚시바늘을 잊어버려용궁공주와결혼)着고로케,쑥모찌(쑥떡)150엔/개1522出에보시타게전망대1530착1555出1645이즈하라着19일0730~0930유명산1230점심후出1255만강교着1308出슈시단풍나무길(편백나무계곡)1420着1430出1500하따카슈着1635出1850부산着저녁모듬생선구이후2040出집20일0115着
 
대마도 수선사: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절
1907년11월의 추운 겨울, 면암 선생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일본 헌병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일본인 경비대장은 “일본 땅에서 일본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군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내 그럴 줄 알고 조선에서 물 한 동이를 떠 왔노라. 나는 오늘부터 이 조선의 물만 마실 것이니 너희들의 명을 따르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일본군이 주는 물과 음식을 거절한 채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이 계속되는 동안 스스로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 것을 알았던 것일까? 면암 선생은 함께 온 제자 임병찬 선생에게 유서를 대신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단식을 하려는 제자들에게는 항일운동을 해야 하니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면암 선생은 대마도에 끌려 온 후 조선에서 가져 온 물 한 동이를 비운 후 계속되는 단식으로 30여일만에 작고한다. 작고하신 후 장례는 배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에 치러진 후 부산으로 운구되었다.

출처 : 포천일보(http://www.pcib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