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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나는 새 2016. 10. 7. 06:15

삼가다 : 언행을 조심하고 경계하다

 

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삼가는 태도

  사전적 의미로 ‘삼가다’는 ‘언행을 조심하고 경계하다’는 뜻이다. 최근 들어 미디어를 통해 조심성 없는 발언과 태도로 사회적 공분을 사는 일을 종종 접하게 된다. 막말, 성희롱, 무시, 모욕… 사람들은 왜 조심하지 않는 걸까.

 

  태어나서 강보(포대기)를 떠난 이상, ‘어디서든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행동했다면 그에 따른 (도의적/사회적/법적) 책임도 져야 한다.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타인에게 불편이나 불쾌감을 주었다면 스스로에게 상식선을 넘은 권한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지나친 ‘자부심’이 가져온 ‘낭패’이자 ‘실패’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돈, 권력, 지식, 미모, 지위, 권한, 식견, 완력, 심미안, 귀하고 특이한 물건 등, 스스로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두를 포함)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그것을 부려 씀으로써 ‘우월감 놀이’를 즐기려던 이의 명백한 오만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 사람의 인격이 말과 행동이 되어, 자신의 신체로 흘러넘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상대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거나 나빠지는 것은 표정이나 태도, 시선 등 몸 전체가 세상을 향해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우리는 상대로부터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표정도 보고 신체 기호도 읽는다. 역설적으로 몸의 주인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 포커페이스도 예외일 수 없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경계심 많은 사람이거나 감정맹임을 고백하고 있을 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는 것, 그것이 사회적 주체로서의 책임이자 의무이며 스스로에 대한 예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의 평화를 위해 기여해야 하고 또 움직여야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배려가 성찰에서 비롯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중인격을 원치 않는다면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이란 홀로 있을 때조차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삼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윤리 교과서를 통해서였다. ‘혼자 있을 때조차 조심해야 한다’는 표현은 드높은 수양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존경스런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모든 ‘연습’은 혼자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마음의 태도나 언행조차 몸에 쌓는 훈련 없이는 아름답게 적절히 부려 쓸 수가 없다. 게다가 언행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생활의 도구이지 않은가. 말과 행동의 방향과 형태는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온다.

 

   ‘가제트의 팔’처럼 스스로의 언행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운영할 수 있는 ‘자기경영의 귀재’라면 상관없을 것이다(물론 가제트 형사는 나쁜 일에 자신의 만능팔을 쓴 일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린이들이 그를 좋아해서 커서까지 기억할 리 없다). 그러나 상대가 나를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계산기로 두드려 ‘가제트 팔’처럼 ‘꾸며 썼다’는 걸 알고도, 진심 어린 관계를 이어가기는 힘든 법이다(이른바 ‘막장 드라마’에서도 ‘감정’을 꾸며내거나 위장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그리는 ‘도덕성’을 갖추고 있을 정도로, ‘진심’은 한국사회의 ‘상식’이다. 정동 연구자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umi]가 사용한 ‘내장적 감각[visceral sensibility]*’이란 표현에는 신체가 의식을 매개할 사이도 없이 즉각적으로 무엇을 느끼고 표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있을 때의 자신이 ‘이중인격’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다면, 마음으로부터 삼가는 태도의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삼가는 연습, 성찰 훈련

   그렇다면 일상을 통해 삼가는 연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당연히 삼가고 조심하며 경계하는 표정이나 몸짓을 연습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야지, 연기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음과 태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내 기억에 마음을 가르치는 교과서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공부는 개인과 삶에 위임되었다고 말하는 건 정확치가 않다. 마음공부야말로 교육이 방치한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해서 교육이 방관한 의무에 헌신해야 한다.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막말’을 한 줄도 모르고, 중요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른이 생겨난 것은 일정 정도는 그 사람의 인격 탓만은 아니다.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스스로의 가치를 성취나 소유가 아닌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을까. 성취는 과연 소유를 통해서만 ‘만끽’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삶의 가치와 태도로 접근해야지, 결코 표정 연기로 도달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반가사유상’은 만족과 기쁨의 표정이 어떻게 연민과 관용, 포용과 이해의 표정을 함축해 성찰의 심연에 닿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개인적으로는 일본의 국보1호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좋다). 보는 것만으로도 차분해지고 저절로 미소 짓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이런 표정을 몸에 담을 수 있나. 예술은 알고 느낀 것을 표현한 것이기에, ‘본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본다는 것은 앎이며, 감동 받은 순간, 우리를 천천히 그 세계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