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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和而不同)

나는 새 2008. 9. 24. 11:11

지난 달 베이징올림픽은 즐거웠다. 중국과 다소 서운한 점들이 없지 않았지만, 중국은 가까웠다. 시차가 단 1시간밖에 안되어서 생중계되는 경기를 즐기기에도 편했다. 특히 개막 쇼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많은 인원과 공중 공연이 펼친 중화문명의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베이징 올림픽 개막 쇼를 보면서 불편한 느낌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화(和)의 세계인가? 동(同)의 세계인가?


개막식에서 펼쳐 보인 ‘화(和)’를 보면서, 공자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떠올렸다. 공자가 말하길,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똑같고자 하지 않고[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은 ‘똑같고자 하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동이불화(同而不和)]’고 했다. 화(和)는 ‘조화, 어울림’을 뜻하고, 동(同)은 ‘똑같음, 한 가지’를 뜻한다. 신영복의 ‘화동론(和同論)’에 의하면,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과 평화공존의 논리이고, 동(同)은 획일적 가치만 인정하는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이다. 다름을 전제하여 ‘서로 어울리는 것’이 화(和)의 세계이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동일함을 추구하는 것’이 동(同)의 세계이다. 공자는 동(同)의 세계가 아니라 화(和)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올림픽 슬로건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은 ‘대동(大同)세상’을 연상시켰다. ‘온 세상이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는 ‘대동세상’은 동양의 이상만은 아니다. 가령 굶어 죽는 지구촌 가족을 돕기 위해 부른 노래 'We Are The World'(우리는 하나의 세계; 1985)는 지구촌공동체의식의 발현이다. 지구촌 어느 곳이라도 굶어죽거나 전쟁에 시달린다면 나의 안녕과 평화는 가짜이거나 불안전한 것이다. 올림픽을 전후하여 지구촌 시민들은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인들을 동정했고, 지진의 재앙을 겪은 쓰촨성 주민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 ‘하나의 세계’는 지구촌 가족의 바람이다.


그런데 동양의 스승 공자와 ‘화(和)’를 내세운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왜 불편함을 느꼈을까? 그건 중국 위정자가 추구하는 세계가 화(和)의 세계가 아닌 동(同)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 아닐까? 안으로 소수민족의 독자성이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고 조화를 강요하거나 밖으로 중국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중화민족주의로 뭉개버리고 중화질서를 강변한다면, ‘하나의 꿈’을 강요하여 다른 꿈은 꾸지도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공자가 말하는 화(和)의 세계는 아니다.


사람들은 분열보다 통일을, 갈등보다 화합을, 혼란보다 질서를 희구한다. 그래서 분란을 빚는 세력조차도 통합을 외친다. 또한 권력추구의 일환으로도 통합을 외친다. 결국 통합의 실제 내용이 문제다. 그것이 내면적으로 소수자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전제적(專制的) 질서는 겉모양과 달리 취약한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분열과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바로 유구한 중국 역사가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중국에 대한 충고는 언감생심이다. 남에 대한 충고보다 나에 대한 반면교사가 급하다. 나를 돌아보느라 남 흉볼 여유가 없다. 우리는 한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약소국 민족을 깔보지는 않는가? 우리 문화를 강조하느라 다른 문화를 배제하지는 않는가? 강대국과 부자에겐 비굴하고 약소국과 빈자에게는 오만한 속물근성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는가?


온 국민의 관심이 베이징에 쏠려있던 올림픽 기간에 국내에서는 공영방송 사장을 제거하기 위해 사정기관들이 전격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사유가 상식적으로나 법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국가기관들의 업무수행이 절차상 정당한 것인지 등을 제대로 따질 여유도 없이 공영방송 사장을 관영방송 책임자 바꾸듯 바꿔버렸다. 겁주기와 언론을 통해 같음(同)을 강요하는 것이다. 화(和)의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화(和)의 세상을


우리나라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결코 60년 된 신생국이 아니다. 이웃 중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좀 서운한 일이 있다하여 일희일비할 것은 아니다. 좋았던 많은 과거를 함께 기억하여 닻으로 삼아야 한다. 아울러 불유쾌한 과거, 부끄러운 과거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역사가 또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민족심리를 자극하여 침략을 선동하거나 외부의 침략세력을 찬양하며 그에 빌붙어 동족을 억압했던 동(同)의 세력에 맞서, 친중, 친일, 친한의 애국애족세력이 화(和)의 힘을 키워나가야 동아시아의 평화와 동아시아인의 행복이 지켜진다.


공자는 노(魯)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중국인만의 것은 아니다. 화(和)의 이름으로 다름을 배제하거나 억지로 조화를 강요한다면 공자가 개탄할 노릇이다. 크든 작든 강하든 약하든,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화(和)의 세상은 우리 세계인 모두가 추구할 바이다. 

 

-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